현존하는 절대 비극의 묵시록, 코맥 맥카시의 '로드'

엄청난 재앙으로 인해 초토화된 지구. 그 잿빛 땅에서 죽지 못해 살아남은 생존자들. 그러나 그들 역시 인간의 멸종을 향해 나아간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무력한 주인공들인 아버지와 어린 아들. 하지만 그들은 예정된 운명을 거부하고 살아남는 것 자체가 소명인 듯 희망을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코맥 맥카시의 <로드>는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현존하는 묵시록이기도 하다. 지구의 멸망.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들은 이미 인류 스스로 멸종할 만한 많은 이유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비록 지금이 인류 멸망의 날은 아닐지라도 그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겐 고통일 때가 있다.

먹고 사는 문제. 그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다. <로드>에 나오는 부자는 지겨울 정도로 굶주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지독하게 굶주린다. 그러다 굶어 죽을 만하면 다 비어 있는 쌀독 밑바닥에서 몇 알 되지도 않는 낱알을 발견하는 것처럼, 겨우 말라 비틀어진 음식을 구한다. 이런 묵시록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로드>에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폐허의 세상에 대한 탁월한 묘사는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의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로드>는 책을 읽는 사람에게 생생한 사실감으로 다가오고, 소설 속 광경은 닭살 돋는 서늘함이 있다. 이 천재적인 작가가 창조한 지옥도는 너무나 세밀해서 읽기가 괴롭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살떨리는 광경을 보는 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코맥 맥카시의 문장은 간결하다. 그 간결함은 거두절미하고 들어가는 본론처럼 명징하다. 그래서 하드보일드하달까. 그의 글을 보면 우리나라 작가 김훈의 문장을 보는 것 같다. 미국의 김훈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김훈의 역작 <칼의 노래>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를 가지고 130여척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수군과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에 골몰한다. 바로 그 점이 <칼의 노래>가 살아있는 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맥카시의 <로드> 또한 마찬가지다. 멸망을 앞둔 이 땅에서 짐승 같은 인간들과 맞서 싸워가며 자신과 아들을 지켜내는 것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바로 먹고 입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다 타버린 지구에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신발과 우의도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자는 창고 바닥에 떨어진 낱알을 먼지와 함께 털어먹고 옷을 찢어 발을 둘둘 감아 신발을 대신한다. 그러고는 희망을 찾아 정처없이 걷는다.

연약한 먹이감을 잡아먹고자 울부짖는 야수와 같이 계속 몰아닥치는 절박한 상황들, 그리고 배고픔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 삶에 대한 희망. 그것은 예전부터 줄곧 들어왔던 주제의식으로, 어떻게 보면 진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맥카시의 <로드>는 그 극한의 상상력 때문에 희망과 생존의지가 새롭고 절박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는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적일 수 있지만, 인간의 고귀한 가치들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희망과 생존의지에 다름 아님을 맥카시의 <로드>는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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